표현하는 삶에 대하여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과 집에서 밥을 다 먹고 나면 언제나 내가 먹은 그릇들을 달그락 달그락 포개 싱크대에 가져다 놓으며 이렇게 말하곤했다.

잘먹었습니다.

언제부터였는지는 잘 기억나진 않는다. 아마도 아주아주 어렸을 적, 감사합니다 해야지! 죄송합니다 해야지!라고 배우던 시절 그런 인사들과 함께 배우지 않았을까싶다. 어느날부터인가 밥을 다 먹고나서 건네는 한마디가 굉장히 의식적으로 들리기 시작했다. 해야지~ 하며 해왔던 인사를 아 내가 이 인사를 하.고.있.구.나 라고 의식이 되기 시작했다. 표현이 의식이 되기 시작하면 남은 몰라도 표현을 하는 나는 어색해진다. 그렇다고 어색함에 인사를 안하자니 지금껏 내내 해온 인사를 갑자기 안하면 괜히 부모님이 서운해할 것 같은 마음이 들더라. 지금껏 잘먹었다는 표현을 그렇게 어색한 습관삼아 이어왔다. 집에서도, 식당에서 마주치는 직원들에게도.

~2019년, 비로소 회고

30살부터 삶이 아주아주 재밌을거에요 — 3년 전쯤 재미삼아 본 사주에서 기억나는 한마디

(엄격하게 생일까지 따지자면 나의 30은 2020년 1월 30일부터지만) 2019년 나의 서른의 해에 나는 ftto와 깊은 유대를 맺었고, 왓챠를 다녔고, 모멘토 브루어스에서 커피를 마시고 봉쥬르밥상에서 저녁을 먹었다. 나의 서른의 해에 내가 만난 이 네가지 삶 안에서 나는 표현하는 삶을 살았다.

나는 언제나 내가 커다란 사랑을 지닌 존재라는걸 알고 있었는데, 나는 누군가의 행복에 크게 행복해했고 슬픔에 슬퍼했고 고통에 아파했으며 안타까움에 눈물을 흘렸다. 그게 내가 받은 가족들의 사랑 덕분이든, 어렸을 적 다양한 삶의 방식을 가르쳐준 고구마 친구들 덕분이든, 혹은 그저 내가 태초에 사랑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든 이유가 무엇이든간에 나는 사랑을 크게 품은 존재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다.

그런 내가 혼자의 시간을 더 즐거워하며 더 편해하며 살았는데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 중학생 때부터 주머니에서 짤랑대는 동전을 가지고 코노(코인노래방)를 갔고, 고등학생 때부터 작품성이 뛰어난 영화라고 주워들은 영화를 본체좀 떨어본다며 홀로 영화관을 갔다. 대학생 때는 코드포서울 커뮤니티를 운영하며 매 주마다 찾아오는 새로운 사람들을 2년간 진심반 억지반 웃음으로 맞이하고난 뒤 나는 관계에 크게 지쳐 더욱 혼자가 되었다. 나는 혼자 있어야 에너지가 채워지는 사람이야라고 스스로를 이해시키며 더욱 혼자의 시간을 보냈다.

큰 사랑을 품었다는 나는 혼자의 시간을 보내는 내내 그 사랑을 표현하는 삶은 살지 않았다. 부모님께 감사하단 인사 한마디 제대로 하지 않았고, 누나에게 미안하단 표현하나 제대로 하지 않았다. 고구마 친구들에게 고맙단 말 한마디 진심으로 건네지 않았고, 나와 소중한 시간을 함께 한 많은 사람들에게 그 시간 속 감정들을 제 때 전하지 못했다. 나는 사랑을 품고 살았지 사랑을 건네고 살지는 않았다.

그렇게 내가 맞이한 2019년 나의 서른의 해에, ftto를 결성했고(정확히는 2018년이지만 현재의 모습을 갖춘건 2019년이다), 왓챠에 입사했으며(이것도 정확히는 2018년이지만 수습 통과는 2019년 1월이니까 ^^) 모멘토 브루어스의 응원군이 되었고, 봉쥬르밥상 사장님의 수다친구가 되었다.

2019년까지의 생일, 외로운 시간과 공간

(썼다 다 지워버렸다. SNS 등에서 보여지는 내 생일을 왜 다 지웠는지, 그동안의 생일은 언제나 외로운 시간과 공간에서 보냈는지 등 대충 이런 내용…)

2020년의 생일

2020년의 생일은 나의 서른의 해를 나눈 넷이 함께했다. 셈으로 가득한 나의 삶에 셀수 없는 것들을 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를 건넨 친구들과 시간을 보냈고, 어쩌면 내가 2020년의 삶을 결정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된 경험을 준 동료 및 친구들과, 내가 무한도전을 좋아했던 이유처럼 그들 각자의 삶을 응원하면서도 그 안에서 서로 힘이 될 수 있는 관계가 되어주자는 친구들과 하루의 시간을 보냈다. 아, “영리해 영리~ 비영리하지 말고”라는 큰 힘이되는 한마디를 주신 사장님의 갈비도 먹으면서 ^^ 잘먹었어요 사장님.

2019년의 나는 다양한 모양의 사랑을 건네고 받으며 살았다. 고맙다고 건넨 표현에 내게 돌아온 사랑이 보였고, 응원을 건넨 표현에 함께 응원하는 마음이 담긴 사랑이 건네져왔다. 축하한다는 표현에 감사함이 담긴 사랑을 받았다. 그렇게 품은 사랑을 표현으로 건네며 한 해를 보냈고, ftto 홈페이지에 적은 나의 소갯말 “깊게 사랑한다. 작고 단단하게, 천천히 가는 삶을 살고자 한다.”처럼 다양한 모양의 깊고 단단한 사랑을 찾아 살았던 것 같다.

잘 먹어서 잘먹었습니다.

요즘의 내가 건네는 “잘 먹었습니다”의 인사는 안하면 어색할까봐, 안하면 서운해할까봐 건네는 습관이 아니라 정말 잘 먹었다는 마음으로 건네는 표현이 되었다. 가끔 집에 내려가 싱크대에 그릇을 놓을 때에도, 영리해 영리~ 라는 봉쥬르밥상 사장님에게도, 아키의 손하트에 부끄러운 웃음으로 화답해주시는 로야토야 쉐프님에게도, 받기만 해서 어떡하냐는 말에 오히려 셀 수 없는 것들을 훨씬 더 크게 받아 고마운 모멘토 브루어스 친구들에게도, 언제나 잘 먹었다는 인사를 건넨다.

의미있는 것은 전달되지 않으면 의미없는 것과 같다. 내가 품은 사랑은 건네지 않으면 그저 품은 사랑으로 나의 삶과 함께 저물어간다. 내가 가진 사랑은 내가 그 사랑을 표현하고 건넴으로써 세상에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것이고 더 풍성해지는 것이라 믿는다. 더 많은 사랑보다 더 깊은 사랑을 나누는 2020년을 보내고싶다.